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인 그레이 (문단 편집) === 죽음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PAUL_DELAROCHE_-_Ejecuci%C3%B3n_de_Lady_Jane_Grey_%28National_Gallery_de_Londres%2C_1834%29.jpg|width=100%]]||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폴 들라로슈 作. 1833년. [[http://arts.search.naver.com/service.naver?where=arts_detail&query=%EB%A0%88%EC%9D%B4%EB%94%94%20%EC%A0%9C%EC%9D%B8%20%EA%B7%B8%EB%A0%88%EC%9D%B4%EC%9D%98%20%EC%B2%98%ED%98%95&os=752313|##]] ||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적법하게 즉위한 [[메리 1세]]는 일단 반역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를 처형했다. 그러나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왕으로 즉위한 제인은 동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단 제인과 길포드를 런던탑에 가둬 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메리 1세는 자신이 당시 스페인의 왕세자였던 [[펠리페 2세]]와 결혼해 후사를 낳아 왕권이 안정되면 제인과 길포드를 사면해 석방시킬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딸에게 해만 끼친 아버지 도싯 후작 헨리 그레이가 사고를 쳐서 제인의 운명을 막다른 길로 몰았다. 토마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가담하여 또 메리를 상대로 반역을 한 것이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도셋 후작도 체포되었으나 자연히 제인을 계속 살려 두면 그녀를 빌미로 신교도들이 또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는 제인을 살려 주고자 그녀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독실한 신교도인 제인은 개종을 끝내 거부했고, 메리 1세는 제인이 살아 있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제인 그레이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메리 1세는 처형을 명하고도 어떻게든 제인을 살려 보고자 처형 당일에 특별히 산파들을 보내 제인의 임신 여부를 검사했다는 비화가 있다. 당시에는 사형을 선고받은 여죄수가 임신하면 무고한 아이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형 집행을 연기해 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면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과 사이가 나빴던 데다가 처형당하기 몇 달 전부터 남편과 따로 유폐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별거 상태였던 제인은 본인 주장대로 임신하지 않았고, 결국 메리 1세도 더는 어쩔 수가 없어 형은 예정대로 집행됐다. 남편 길포드 더들리도 같은 날에 참수되었다.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게 마지막을 준비한 제인과 달리 신세를 한탄하던 길포드는 죽기 전에 위로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아내인 제인을 만나 보고자 사람을 보냈으나 제인이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날 [[런던탑]]의 타워힐에서 길포드가 먼저 참수되었고 그 시신이 수레에 끌려 왔을 때 제인은 그것을 보고 >"아, 길포드! 길포드!" 라고 소리치며 울었다고 한다. ~~한심한 남편이었어도 어른의 사정으로 죽는 건 자신과 마찬가지라 안타까웠던 모양(...)~~ 아름답고 총명했지만 전술한 대로 무능한데 야심만 많은 부모 때문에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경우라 비공개로 처형당할 당시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제인의 시녀들은 물론이고 메리 1세가 보낸 신하들조차도 그녀를 동정했다고 한다. 제인은 눈이 가려졌을 때 처형대를 못 찾아 당황한 것 말고는[* 침착하게 처형대에 올랐으나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 처형대를 찾지 못해 "어디 있지?"라며 당황해하다 울음을 터뜨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결국 사제가 제인의 손을 잡아 처형대로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위의 들라로슈 작 창작화가 이 에피소드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는데, 역시 처형을 앞두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던 길포드와 사뭇 달랐던 그 모습 역시 안타까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고작 16세.[* 만 16세로 계산한다고 쳐도 겨우 '''고등학생''' 나잇대다(...). 미처 성년이 되기도 전에 처형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말이 된다.] 말 그대로 한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제인 그레이는 신교를 버리고 구교를 택하라는 메리 1세의 제안에 "이 땅에서 생명을 지속하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버릴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자존심과 고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신앙심 때문에 순교했다고 보는 게 옳은 해석이다. 무엇보다 중세 유럽의 종교(기독교) 문제를 현대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다. '''중세~근세의 유럽에서 종교란 윤리를 비롯한 사회제도 전반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의 근본이었고, 따라서 현대인이 생각하는 '국가' 나 '이념', '민족' 등의 개념 이상으로 충성을 바쳐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즉, 제인 그레이는 '신앙이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당대의 윤리관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개종했으면 살 수 있는데 '''괜한 자존심과 고집을 부리다''' 죽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마치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까짓 거 일본이 요구하는 대로 전향했으면 살 수 있었는데 괜히 자존심과 고집을 부리다 죽었다'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개종했더라도 이미 한번 반역자들이 왕으로 앉혀 '전 여왕'인 제인을 살려서 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살았더라도 나중엔 결국 비슷한 운명을 맞았을 확률이 높으니 그 꼴을 보고 무의미하게 연명하기보다는 순교로 영원히 남는 길을 택하는 게 낫다고 보았을 법하다. 전술한 대로 이미 불행으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냈던 터라 희망을 가지기 보단 삶에 철저히 지쳤을 법도 하고, 휘둘려서 고초만 겪는 인생에 애착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제인의 어머니 프랜시스 브랜든은 제인과 남편 헨리 그레이를 구명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남편이 반역죄를 지어 처형당하면서 재산을 국고에 몰수당해 한때 빈털털이 신세가 됐으나 곧 자신의 시종과 재혼해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게다가 나중에는 [[메리 1세]]의 사면으로 궁정에 복귀까지 했다. 이후 프랜시스는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자녀들을 낳고[* 하지만 두 명은 사산했고, 한 명은 생후 7개월 만에 사망했으며 이후에는 더는 자식을 갖지 못했다.] 잘 살다가 1559년에 사망했는데 죽을 때까지 딸 제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프랜시스는 제인의 동생들인 캐서린과 메리와도 사이가 매우 나빠 재혼하고 나서는 딸들이 어머니 프랜시스와 의절했다. 사망했을 때도 막내딸 메리에게는[* 이때 둘째딸 캐서린은 폐결핵으로 28세에 이미 요절한 상태였다. 몰래 한 결혼이라서 나중에 결혼 사실을 입증하느라 남편이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캐서린의 손자인 윌리엄 시모어(제인 시모어의 오빠의 증손자다.)는 서머싯 공작이 되었고, 현재는 그의 6촌 형의 후손이 공작위를 가지고 있다.] 20파운드의 돈만 주고 대부분의 유산은 새 남편에게만 주었지만 어머니를 싫어하는 메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참고로 메리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났는데[* [[곱사등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레이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명색이 귀족가의 여식인데도 결혼하지 못하다 늦은 나이에 평민과 결혼했다. 이 결혼 역시 언니인 캐서린의 결혼처럼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결혼이라는 얘기가 많았으나 메리도 30대 초반에 언니들처럼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기에 더 논란이 되는 일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